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그나 카르타 (문단 편집) == 그 이후 == 마그나 카르타가 만들어진 건 [[존 왕]]의 탓이 크다. 존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참패하여 [[프랑스 왕국|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하였다. 이를 되찾으려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가 역시 패배하였다. 이로 인한 나라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봉건 귀족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물리려다가 사달이 난다. 전쟁에 이미 막대한 세금을 납부한 귀족들은 세금을 추가로 부과한 것에 반발하였다. 1214년 영주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한 데 이어 1215년 귀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하였으며, 여기에 런던시가 가세함으로써 수도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그제서야 존 왕은 귀족과 성직자, 도시민까지 왕권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왕에게는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퇴위는 물론이고, 처형당할 것을 깨달아 공포에 질린다. 그러나 영주들 간에 '''왕을 처형할 것까지는 없고, 대충 합의보자'''라는 온건론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왕권을 줄이는 각서를 받는 선에서 이만 합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제정된 문서가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에게 [[존 왕]]이 방문하여 각서에 서명함으로써[* 당대 영국의 관습을 고려했을 때, 역사가들은 존 왕 본인이 서명하지 않고 공문서 보관소(chancery)에 소속된 날인자(spigurnel)가 왕의 인장을 사용하여 밀랍 위에 도장을 찍었다고 추정한다.]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잉글랜드 국왕|국왕]]의 권한이 약화된 건 아니었다.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에게 귀족들을 고발했고 최강의 [[교황]]권을 누리던 인노첸시오 3세는 "너희들 까불래! 어디서 왕을 협박해!"라고 하며 무효를 선언하는 바람에 마그나 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 직후에 일어난 내전에서 섭정이자 [[헨리 3세]]의 보호자인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프랑스군과 연합한 반란 귀족들을 [[개박살]]내면서 사실상 궤멸 상태가 되어버렸다. 덧붙여서 존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너희들이 내 아버지 존 왕하고 약속했지 나하고 약속했냐?"'''라면서 무시해버렸다.[* 사실 마그나 카르타는 어디까지나 '존 왕의 권리 제한'이 목적이었다. 헨리 3세도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긴 했으나 내용을 상당히 수정했고 나이먹고 나선 아예 무시해버렸다.] 결국 헨리 3세 말년에 또다시 귀족들의 반란이 터지고, 1260년대부터 잉글랜드에 의회 제도가 정착되며 이론적으로 국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법에 종속되는 입장이 된다. 이상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시대지만 중세 후기인 13-15세기는 서유럽 곳곳에서 [[대의제]]의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마그나 카르타를 계기로 만들어진 영국의 의회는 초기에는 남작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에드워드 1세]] 시기부터 기사 74명(각 샤이어당 2명), 부르주아 80명(각 도시당 2명), 하급 성직자 148명으로 구성된 하원이 정기적으로 소집되기 시작했고, 1275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은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의 조언counsel과 승인assent으로' 공포되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최종적으로 인정했고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1320년경에 쓰인 <의회를 여는 방법Modus Tenendi Parliamentum>이라는 책은 '왕국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사와 부르주아들이 이미 위대한 백작들보다 왕국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기인 1302년 프랑스에서도 [[필리프 4세]]가 최초로 [[삼부회|총신분회의]]를 소집했고 [[사회계약론|자신의 왕권이 왕국 공동체의 '선출'에서 기원한 것임을 강조하며]] 모든 계층의 지지를 구했다. 이때부터 프랑스 왕은 왕국의 주권자로, 즉 '왕국 내 황제'로 인정은 받았지만, 이론상 어디까지나 인민의 동의를 받았을 경우에만 그러했다. 프랑스 민중들이 이때 주어진 명목상의 권리를 실제로 행사하는 것은 5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되었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의 근원은 남작과 젠트리 등 지주들에게 있었다.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들도 벌어들인 돈의 상당수를 토지에 투자하거나 아예 스스로 지주 귀족 계층에 편입되었다. 이 지주들의 권력은 토지 소유에 기반했고, 따라서 토지 소유권의 안전을 보장하는 왕의 법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즉, 지주들은 지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이 필요했다. 현대의 공장 화재와 달리 전쟁으로 황폐화된 중세 경작지의 손실은 보험금으로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이라는 더 나은 대안이 있는 한 스스로의 무력으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주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모든 지주들은 질서가 무너져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따라서 존 왕 같이 강한 권력을 남용해서 지주들을 착취하는 폭군도 위험하지만 권력이 약해서 모든 당파 위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없는 왕은 폭군보다 더 위험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13-15세기 정치의 주요 담론이었던 '공동체에 대한 봉사'는 [[장미전쟁]]의 혼란을 거친 뒤 [[튜더 왕조]] 시대부터 '국왕에 대한 복종'에 자리를 내주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마그나 카르타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마그나 카르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을 두고 하는 언급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희곡 존 왕이 존 왕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의 정당한 왕위 계승과 왕권 행사에 대해 [[교황]]이 이를 부정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비슷한 상황을 겪은 존 왕의 사례를 통해서 묘사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다시 말해서 희곡 존 왕의 초점은 존 왕이 겪은 일들과 그의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 초점을 놓고 왕권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희곡 존 왕에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라고 들이민 주동자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버젓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몰랐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해석은 각자의 판단. 영어가 된다면 [[http://public.wsu.edu/~delahoyd/shakespeare/kingjohn1.html|이곳]]의 두 번째 문단을 읽어볼 것.]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약 50년 전에 인쇄된 출판물에도 등장했으며, 저술가이자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의원이었던 조지 페러스(George Ferrers)는 1534년[* 셰익스피어는 1564년생.]에 마그나 카르타를 37개 항목으로 정리해서 [[영어]]로 출판했다.[* 1215년 당시에는 [[라틴어]]로 작성했다.]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했던 에드워드 쿠크 경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사람으로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태어나서 먼저 죽었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 기간은 [[절대왕정]]이라 마그나 카르타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마그나 카르타의 항목을 감히 실행에 옮길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 17세기에 접어들어 국왕과 의회의 대립이 재점화됨에 따라, 마그나 카르타가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 의회는 마그나 카르타를 근거로 왕권에 맞섰다. 특히 에드워드 코크는 재판장으로서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함으로써 [[법치주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활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